"60초 후에 공개됩니다."라는 말에 들고 있던 TV리모콘을 내동댕이치고, "제 점수는요.."라는 말에 침을 꼴깍 삼킨다. 임재범이 부른 "여러분"에 눈물 흘리고, 김연우가 떨어진 것이 믿기지 않아 기사에 댓글을 남긴다.
2011년, ‘무한 경쟁의 시대’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의 눈길을 사로 잡았던 방송 프로그램은 바로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 공중파, 케이블 할 것 없이 모든 방송사에서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방영하였고 시청률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사람들은 그저 TV로만 시청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참여하기에 이르렀으며 덕분에 보컬학원, 악기점의 매출도 같이 올랐다.
안 그래도 경쟁 때문에 빡빡한 삶, 대체 사람들이 오디션 서바이벌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TV는 온통 ‘리얼 버라이어티’ 일색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웃길 것 같은 연예인들을 떼로 불러다 놓고 대본 없이 장시간 촬영하는 형태인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무한도전에서 시작해 1박 2일, 라인업, 패밀리가 떴다 등 여러 프로그램으로 이어지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하나 둘 사라지고 외국의 인기 쇼를 그대로 따온 ‘오디션 서바이벌’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2010년 방영된 M.net ‘슈퍼스타K 시즌 2’는 1%만 넘어도 대박이라는 케이블 TV프로그램의 룰을 깨고 무려 19%라는 시청률을 기록했고, 이 인기에 편승한 MBC ‘위대한 탄생’도 첫 생방송 시청률 20%를 넘기며 선방했다. 이후 오디션 서바이벌이라는 포맷을 차용한 약 20 여 개의 프로그램이 안방을 점령했는데 최고의 밴드를 뽑는 서바이벌에서부터 요리사, 모델, 연기자, 디자이너, 심지어 다이어트까지 그 아이템은 실로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인기를 누린 프로그램은 가수가 되기 위해 일반인들이 겨루는 오디션 프로그램과 내로라하는 프로 가수들이 무대를 만들어 청중평가단의 평가를 받는 서바이벌 경연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 이다. 2010년 8월부터 2011년 7월까지의 Daum의 검색 트렌드 차트를 보면, 올해 초 중반부터 시작된 ‘나는 가수다’에 대한 검색 건수는 최대 70만 건을 넘는다.
나가수와 더불어 일반인 오디션프로그램의 인기도 만만치 않았다. 2007년 1월부터 2011년 7월까지 Daum에 제공된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기사는 꾸준히 상승하여 지난 2011년 6월에는 1867건에 달했다. 일반인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의 대표격인 슈퍼스타K(이하 슈스케)의 경우 올해 시작했던 시즌 3에만 200만에 육박하는 지원자가 몰렸고, 시즌 3 결승전의 문자투표수는 170만건으로 시즌 2의 140만건보다 30만건이나 상승했다. 이쯤 되면 오디션 서바이벌이 국민적인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완벽한 외모에 어느 정도 실력도 갖추고 예능감까지도 특출난 ‘만들어진’ 아이돌 일색이던 대한민국 가요계에 이들이 낄 자리는 없어 보였다. 뛰어나지 않은 외모를 가진 이들은 여러 기획사에서 몇 번이나 퇴짜를 맞았고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려면 다른 길을 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이들을 스타로 만들었고 대중은 이제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며 열광한다. 이는 바로 지난 슈스케 시즌 2의 우승자 허각과 위대한 탄생 시즌 1의 우승자 백청강의 이야기이다. 가난한 환풍기 수리공이었던 허각과 조선족 청년 백청강은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 이후 한국에서 웬만한 가수들보다도 더 많이 알려진 스타로 급부상했다.
일반인스타 허각과는 다르게, 슈스케 시즌 3의 울랄라세션은 이미 앨범까지 냈었던 숨겨진 실력자들이었다.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실력 있는 아마추어를 발굴한 동시에 숨은 프로들도 찾아냈던 것. 나가수도 마찬가지이다. 소름끼치는 가창력을 지닌 기성 가수들은 나가수로 인해 새로이 주목을 받았다. 나가수에서 명예졸업(7번의 경연에서 탈락하지 않고 살아남은 가수들은 명예졸업이라는 이름으로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게 된다)을 한 박정현과 김범수의 경우, 프로그램 출연 이후 각종 CF섭외, 음원판매 증가, 콘서트 전석 매진 등으로 인기가 이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엽, 임재범, JK김동욱, 김연우 등 비교적 짧은 시간 나가수를 거쳐간 다른 가수들도 실력이 재조명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10대 아이돌 음악이 점령하고 있던 음원 인기차트는 나가수 참가곡들로 메워졌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실력파 가수들이 인정받는 시대가 온 것이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선배가수들의 폭발적 인기가 새로운 신인가수 등용문을 좁힌다는 비판적 견해도 존재했다.
서울 강남에서 보컬 트레이닝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원장 A씨는 오디션 서바이벌 열풍의 덕을 좀 봤다. 슈스케와 위대한 탄생 등 오디션에 참가하고자 하는 학생들로 인해 수강생들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사업 수완이 좋기로 유명한 A씨는 집중적으로 오디션 준비를 도와주는 ‘슈퍼스타K 대비반’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수강생 유치에 나섰다. 신바람이 나는 건 종로에서 악기점을 운영한다는 K씨도 마찬가지. 기타뿐만 아니라 하모니카나 젬베와 같은 비교적 대중적이지 않은 악기들도 불티나게 팔려나가 요새 매출이 부쩍 올랐다.
오디션 열풍이 가수 지망생을 넘어 전국민에게 번져 나가면서 실용음악 업계가 호황을 맞았다. 심지어 한 악기 제조업체는 슈스케 방영 이후 악기 판매량이 늘어 주식가격까지 올랐고, 2011년 1월부터 7월까지의 악기수입액은 전년 동기대비 21.8%나 증가했다. 또한 서울 신사동의 보컬학원은 슈스케 방영 전에 비해 수강생이 3배 이상 늘었으며, 백화점 내 문화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현대백화점은 노래강좌를 70개에서 90개로 확대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오디션에 나가 우승을 해서 가수가 되겠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가수를 보고 ‘박정현처럼 노래하고 싶다’는 회사원이나, 슈스케에 도전한 임산부를 보고 자극받아 ‘나도 노래 한번 해볼까’하는 주부들이 더 많다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공정한 경쟁’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2010년 하반기에 인문 번역서 최초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던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 사회는 정의, 즉 공정한 경쟁에 목말라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돈이나 외모, 가정환경이 아닌 ‘실력’으로만 평가 받는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위와 같은 갈증을 얼마간 해소시켜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바이벌 프로그램에는 대중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존재한다. 단순히 참가자로서 프로그램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심사위원이 되어 참가자를 평가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공정한 심사’를 실현하는 데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권력자로 등장하는 패널 심사위원이 혹독한 평가를 내릴지라도 문자투표로 인해 대중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살아남을 수 있으며, 이 때 시청자들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실제로 슈스케와 위대한 탄생에서 심사위원 점수가 가장 낮은 후보가 문자투표에서 많은 지지를 얻어 다음 단계로 진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이유 또한 내재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디션 서바이벌에는 ‘스토리’가 존재한다. 2010년 9월부터 2011년 8월까지의 Daum 뉴스 조회수를 분석해보면 오디션 서바이벌 관련 뉴스 중 가장 상위를 차지하는 것은 <'나가수' 임재범, '솜빠진 헤드폰 속 고된 삶'>으로 당시 나가수에서 1위를 차지한 임재범의 힘들었던 과거를 설명하는 기사이다. 마찬가지로 슈스케 관련기사 중 가장 조회수가 높았던 기사는 불우한 가정사를 밝혔던 출연자의 탈락 소식을 전했던 <엄정화, '슈퍼스타K 2' 심사 도중 눈물 글썽>으로, 이 또한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다. 슈퍼스타K 시즌 2의 우승자였던 허각도, 시즌 3의 우승자였던 울랄라세션도 어려운 환경에서 포기하지 않고 꿈을 좇은 이들이었다. 사람들은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출연자들의 인생 스토리에 울고 웃기를 원하는 것이다.
특히 나가수는 매주 일요일 저녁이면 기성 세대를 TV 앞으로 앉도록 했다. 월요일, 회사에서는 ‘너 어제 나가수 봤어?’라고 물어보는 게 새로운 인사법이 되었다. 나가수와 같은 기성 가수들의 경연 프로그램은 중장년층에게 ‘음악을 듣고 싶다’라는 갈망을 불러 일으켰다. TV를 틀면 언제나 나오는 아이돌의 음악은 신선하지만 왠지 자신과는 어울리지는 않다고 느껴져 언제부터인가 가요 프로그램은 보지 않았었다. 나가수는 이러한 중장년층들의 음악에 대한 잠재 욕구를 자극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요즘 들어, 직접 공연장을 찾아가서 ‘음악’을 듣고자 하는 넥타이 부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많아진 느낌이다.
가수에게 있어 다른 어떤 요소가 아닌 ‘실력’이 우선시되고, 음원 차트는 신구 세대의 음악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강습을 받는 사람들이 늘었다. 얼핏 오디션 서바이벌 열풍은 대한민국 국민의 문화 예술적인 삶의 질을 높여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어두운 측면 또한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맥락 없는 자극적인 편집으로 인해 마녀사냥을 낳았고, 근거 없는 루머성 기사가 양산되기도 하는 등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낳은 부정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음악이라는 예술형태를 서열화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특성으로 인해, 서열을 매길 수 없는 대상의 ‘경쟁’과 ‘서열’을 마치 당연한 것인 양 받아들이게 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서바이벌이라는 요소가 없었다면 이 프로그램들이 대한민국 국민의 눈길을 끌 수 있었을까? 한 가수가 대학생 대상 강연회에서 말했다. “나가수에 서바이벌이라는 요소가 없었다면 이렇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나가수에서 새로이 주목 받게 된 가수들은 서바이벌 없는 음악프로그램인 열린 음악회에 이미 여러 번 출연했었던 사람들입니다.”
서바이벌 오디션을 둘러싼 이 비판들을 극복하려면 ‘서바이벌’이라는 아이템을 단순한 자극거리나 미끼로 사용하지 않고 프로그램 본래의 취지에 적합하게 사용하는 혜안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다는, 그리고 진정 좋은 음악을 더 많은 이들에게 들려주겠다는 본연의 자세를 잃지만 않는다면 ‘서바이벌’이라는 강력한 오락 요소를 필두로 한 이들 프로그램은 당분간은 대한민국 국민들을 사로잡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