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 가요계는 혜성처럼 등장한 몇 명의 '남자'들 때문에 떠들썩했다. 막내가 65세라는 이 그룹(?)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국민 모두의 찬사를 받으며 하나의 신드롬으로까지 불린 '세시봉(C'EST SI BON) 친구들'. 데뷔 40년을 맞은 이들을 보며 어떤 이들은 추억에 잠겼고 어떤 이들은 신선한 놀라움에 빠졌다. 여기저기서 잊혀졌던 옛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고 복고 간식과 복고 패션까지도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복고 열풍에 힘입은 복고 영화 ‘써니’는 스타배우 한 명 없이 올 상반기 최대 히트작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2011년은 ‘복고’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때아닌 복고 열풍에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다. 복고 열풍의 주역은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등이 속한 세시봉 친구들과 영화 써니. 그 시작은 2010년 9월 방영된 MBC ‘놀러와’의 한가위 특집 세시봉 친구들 편이었다. 이 날 방송에는 40년 만에 첫 예능 출연이라는 송창식을 비롯해 윤형주, 조영남, 김세환과 같이 예능에서 보기 힘든 얼굴들이 대거 출연하였다. 새로운 영화나 앨범을 홍보하러 나오는 배우들과 가수가 출연자의 주를 이루었던 기존의 방식을 잠시 벗어나 추석연휴 TV앞에 둘러앉은 7080세대를 겨냥한 특별 편성이었다.
예상외로 반응은 뜨거웠다. 이날 방송은 AGB닐슨미디어리서치 집계 결과 전국 시청률 15.4%를 기록했으며, 이는 동시간 대 SBS와 KBS2의 추석특집 프로그램 시청률이 각각 10.3%, 8.8%에 불과했던 것을 고려할 때 한참 높은 수치임을 알 수 있다. 방송 후에는 이들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세시봉이라는 ‘신발견’때문에 인터넷이 한동안 들썩였다. 놀러와 제작진은 기세를 몰아 ‘세시봉 콘서트’라는 토크가 거의 없는 콘서트 형식의 설 특집을 선보이기도 하였고, 이 또한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렸다. 설 특집 세시봉 콘서트는 16.9%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였고, 이 방송으로 놀러와의 PD는 백상예술대상과 한국방송대상에서 상까지 타게 됐다. 하지만 누구도 이 복고 열풍이 1년이 넘는 기간까지도 지속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세시봉 특집으로 활짝 열어놓은 7080세대의 추억과 아날로그적 감성은 유명 가수와 아이돌이 리메이크한 옛 노래들로, 그때 그 시절을 그린 영화로, 또 레트로 코드를 입힌 패션으로까지 이어졌다. 특히 80년대 복고문화를 유쾌하게 그린 영화 ‘써니’는 올 상반기 최고 히트작으로 스타급의 주연 한 명 없이 744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영화 역대 흥행순위 11위에 올랐다. 그야말로 ‘복고’가 트렌드인 해였던 것이다.
Daum에서 제공되는 2007년 1월부터 2011년 7월까지의 기사공급량 그래프를 살펴보면, ‘복고’라는 키워드의 뉴스기사는 전부터 꾸준히 있어왔지만 올해 들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올해 방영된 CF에는 유난히 통기타가 자주 등장했다. 공원에서 젊은 남녀가 통기타를 꺼내들고 화음을 맞추거나, 한 여학생이 통기타를 연주하며 한숨을 내쉬자 가수 김윤아가 나타나 도와준다거나, 10cm와 하지원이 함께 통기타와 젬베를 연주하며 노래를 한다. 젊은 세대들이 통기타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요새 낙원상가에서는 초보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10만원대 기타가 동이 나고, 아이유 등 연예인들이 들고 나온 기타 모델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통기타 배우기 열풍에 참여한 것은 젊은이들뿐만이 아니다. 중년들도 그 동안 잊고 지냈던 통기타를 다시 찾게 되어, 국내 기타 판매량이 전년 대비 2배 가량 상승했다고 한다.
통기타의 인기를 견인한 것은 오디션 열풍과 함께 세시봉이 몰고 온 아날로그와 복고 바람의 힘이었다. 2010년 8월부터 2011년 7월까지의 Daum의 트렌드 차트를 참고하면 세시봉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이 생긴 이후 통기타에 대한 검색량이 점점 많아지며, 통기타 검색이 가장 높은 구간에서 세시봉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복고’라는 단어는 그 동안 패션계 및 연예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키워드였다. 하지만 그 동안의 복고 열풍과 올해가 다른 점은 복고가 한국인의 일상 및 소비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011년 상반기 소비 트렌드로 G마켓이 뽑은 5가지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RETRO(복고) Style 이다. 롱스커트와 테일러드 재킷 등의 복고 패션 아이템을 비롯하여 쥐포, 분홍 소시지와 같은 저렴한 복고풍 간식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고 한다.
한편, 복고의 옷을 입은 ‘주크박스 뮤지컬’도 화려하게 재조명을 받았다. ‘주크박스 뮤지컬’은대중에게 검증된 기존의 인기 곡을 삽입한 창작 뮤지컬의 형태를 말한다. 이러한 형태의 뮤지컬이 올 한해 큰 사랑을 받았는데, 주크박스 뮤지컬의 인기는 그 동안 눈길을 받지 못했던 한국 창작 뮤지컬의 미래에 긍정적인 전망을 불러 일으켰다. 2011년 상반기에 제작된 대규모 주크박스 뮤지컬은 온에어 초콜릿, 어디만큼 왔니 등 6-7여 편. 이 중 동남아를 겨냥한 아이돌 K-POP 주크박스 뮤지컬 ‘늑대의 유혹’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옛 음악을 위주로 제작되었다. 특히 故이영훈이 작곡하고 이문세가 노래한 80년대 곡들로 이루어진 뮤지컬 ‘광화문 연가’는 올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으로 평가받으며 큰 인기를 끌었고, 지난 2007년 초연한 8090 주크박스 뮤지컬 ‘젊음의 행진’은 복고열풍에 힘입어 5번째 재연을 결정하였다.
현란하고 자극적인 사운드의 홍수 속에서 잔잔하고 소박하기까지 한 세시봉의 음악이 어떻게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세시봉의 음악이 사람들에게 내재된 아날로그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몇 년간 가요계를 평정한 것은 강한 비트, 그리고 자극적인 전자음과 함께 일부 가사만이 반복되는 후크송이었다. 그러나 점점 아무 뜻도 없는 가사가 남발하고 사람의 목소리보다 기계음이 많이 들어가는 디지털 음악이 난무하자 이에 대한 피로감이 싹트기 시작한 것 같다. 사람들은 세시봉의 어쿠스틱 기타 소리와 스토리가 살아있는 가사, 그리고 연륜과 무게가 있는 그들의 화음을 들으며 이러한 피로감을 해소할 수 있었다.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고, ‘목소리’로 노래하는 아이돌 아이유가 작년 한 해 급부상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시봉이 전해 준 아날로그 향수 속에는 7080세대만이 느낄 수 있는 그리움 또한 존재했다.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을 겨우겨우 따라가며 각박한 삶을 살고 있는 7080세대에게 세시봉의 음악은 좋았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고 이는 영화 써니도 마찬가지였다. 일곱 명의 여고동창생들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써니의 이야기는, 0 아니면 1로 대변되는 디지털적 인간관계가 아닌 아날로그적 인간관계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을 것이다. 관계자에 따르면 동창회를 통한 영화 재관람이 관객 700만을 동원한 써니의 뒷심이었다고 한다.
“ ‘커피’ 하면 떠오르는 노래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지난 6월 KBS2 ‘스펀지 제로’에서 방송되었던 내용으로서, 트렌드 나이를 알 수 있는 10가지 문항 중 하나다. 질문에 대한 답으로, 직장인의 70%는 1968년 발표된 펄 시스터즈의 '커피 한잔'을 떠올렸고, 대학생의 72%는 2010년 발표된 10cm의 '아메리카노'라고 답했다. 이는 한국 대중 문화에서 세대 차이가 얼마나 크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세시봉과 써니로 인한 복고물결의 파장이 이토록 컸던 데에는 ‘커피한잔’ 세대가 아닌 ‘아메리카노’ 세대의 위력이 크게 작용했다. 세시봉의 음악을 듣고 SNS와 각종 블로그 게시물들을 통해 감탄의 여론을 형성한 것은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20대에게 세시봉은 작은 할아버지뻘 되는 신인가수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회상할 추억 없이도 노래에 담긴 무게와 시적인 가사의 위력이 젊은 세대에게 ‘신선함’으로 통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세시봉 열풍이 아마도 한국 대중음악 사상 젊은 세대가 가장 먼 윗 세대의 음악에 반응한 사례일 것이라고 말했다. 아날로그적 감성은 아날로그의 시대를 살아온 구세대의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최첨단의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신(新) 인류의 피에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써니를 통해 엄마의 여고생 시절을 이해하고, 온 가족이 세시봉의 음악을 들으며 휴가를 떠나는 새로운 세대공감 복고문화가 생겨난 것을 보면 말이다.